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미성년자 SNS 금지법, 계정은 지워졌는데 나이는 안 지워졌다

테크/IT·과학

by 잘난코 2026. 7. 4. 00:23

본문

반응형

스마트폰 나이 인증 게이트를 통과하려는 미성년자 실루엣을 표현한 개념 일러스트

호주에서 지난해 12월 10일 새 법이 시행됐다. 온라인안전개정법(Online Safety Amendment, Social Media Minimum Age Act 2024)이다. 인스타그램·페이스북·틱톡·스냅챗·유튜브 등 10개 주요 플랫폼에 16세 미만 이용자를 부모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전부 막으라고 못 박은, 세계 최초의 법이다. 시행 한 달 만에 규제기관 eSafety 커미셔너가 밝힌 숫자는 470만 개. 이 기간 동안 삭제된 16세 미만 계정 수다.

숫자만 보면 법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읽힌다. 그런데 실제로 아이들이 SNS를 못 쓰게 됐느냐고 물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이를 확인하는 방식부터 허술하다. 스냅챗은 싱가포르 업체 k-ID를 붙여서 정부 발급 신분증, 은행 확인 문자, 혹은 셀카 중 하나로 나이를 가늠하고, 계좌 인증을 거친 커넥트ID도 병행한다. 메타는 요티(Yoti)를 붙여 영상 셀카나 신분증으로 나이를 추정한다. 문제는 이 얼굴 인식이 생각보다 쉽게 뚫린다는 데 있다. 호주방송공사(ABC) 보도에 따르면 13세 아이는 이를 가리고 얼굴을 찡그리는 것만으로 셀카 인증을 통과했고, 14세 아이는 아예 나이를 23세로 바꿔 입력하고도 k-ID 검증을 통과했다. 12세 딸을 둔 학부모는 딸과 친구들이 인조 속눈썹과 화장을 하고 17세 이상으로 인증받았다고 전했다. 가짜 신분증을 쓰거나, 형·언니한테 대신 얼굴을 스캔해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법이 세계로 번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호주 내 여론조사에서 유권자 3분의 2가 16세 상한을 지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보도가 있었고, 덴마크·노르웨이·말레이시아 등이 비슷한 연령 제한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인증 기술의 허점과는 별개로, "일단 나이 상한을 법으로 그어놓는다"는 방향 자체에는 여러 나라가 동의하고 있는 셈이다.

이탈리아는 그 뒤를 따라가는 나라 중 하나인데, 정작 국내 사정은 더 복잡하다. 상원에는 15세 미만 접근을 막자는 멘누니 법안이 지난해 10월부터 위원회에 멈춰 있고, 하원에는 13세 상한을 주장하는 카르파냐(노이 모데라티) 법안이 따로 있다. 레가 소속 스테파니 베네토 주지사가 낸 법안, 민주당 니치타·바소 의원이 낸 법안까지 더해지면서 같은 목표를 둔 법안이 네 갈래로 흩어져 있다.

이 네 갈래가 그냥 우연히 겹친 게 아니다. 멜로니 정부는 이 문제를 두고 입장을 세 번 바꿨다. 처음엔 한 학생이 SNS발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사고를 계기로 법안 추진을 독려했고, 그다음엔 여당(형제당) 소속 라비니아 멘누니 의원이 낸 그 법안을 6개월 가까이 위원회에 묶어뒀다. 정부 자체 법안을 따로 내겠다고 예고했다가, 5월 15일엔 다시 "의회에 입법 주도권을 맡기겠다"고 선회했다. 야당과 시민단체는 정부가 알고리즘 의존형 지지층과 빅테크와의 관계를 의식해 몸을 사린 거라고 본다. 결국 지금 다시 논의의 중심으로 돌아온 건 정부가 한때 얼려뒀던 바로 그 멘누니 법안이다. 여당 소속 의원 법안이라는 태생이, 카르파냐·베네토·니치타 법안보다 유리한 출발선을 만들어준 셈이다. 기술적으로는 6월 30일까지 EU 디지털 신원지갑과 연동되는 국가용 "미니 전자지갑"을 가동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뒀다. 생년월일을 거짓으로 적어 넣기만 하면 통과되던 자기신고 방식을 끝내겠다는 취지다. 나이만 놓고 15세와 13세 사이에서 법안이 갈라져 있는 데다, 정부조차 어느 법안을 밀지 세 번 뒤집은 걸 보면, 합의는 나이보다 정치적 셈법에서 먼저 막힐 공산이 크다.

호주의 미성년자 SNS 금지 시행부터 인증 우회, 여론 확산, 이탈리아 법안 경합까지 이어지는 흐름도

한국은 아직 법이 없다. 그렇다고 논의가 없는 것도 아니다. 국회에는 2024년 7월부터 2025년 1월 사이 윤건영·김장겸·안철수·조정훈·김태선·조인철·황운하 의원이 각각 발의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7건이 계류돼 있다. 대부분 14세 또는 16세 미만 아동·청소년의 SNS 가입을 제한하거나 법정대리인 동의를 의무화하는 내용이고, 중독을 유발하는 추천 알고리즘과 야간 알림을 제한하자는 조항도 겹친다. 다만 아직 법제사법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해 본격 심의는 시작도 안 됐고, 방송통신위원회도 자체 법안을 내는 대신 "국회 입법 논의를 지원하겠다"는 원론적 입장만 밝혀둔 상태다. 호주가 법을 만들고 이탈리아가 몇 살로 그을지를 놓고 싸우는 동안, 한국은 아직 그 싸움의 초입에 서 있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법이 통과되기를 마냥 기다릴 이유가 없다는 게 더 와닿을 것이다. 호주 사례를 계속 들여다보면, 법이 아이를 막아준다기보다 아이가 법을 뚫는 속도가 더 빠른 쪽으로 자꾸 기운다. 계정을 지우는 집행력과 나이를 속이는 통과력이 동시에 늘고 있으니, 부모 입장에서 믿을 구석은 국가 인증 시스템보다 당분간은 여전히 각 가정의 손에 쥔 도구다. 다행히 플랫폼들이 법과 별개로 이미 내놓은 장치는 있다. 인스타그램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미국 영화등급 13세 이상 관람가(국내 기준 12·15세 관람가에 해당) 수준의 콘텐츠 제한을 순차 적용 중이고, 만 14~16세 청소년 계정은 보호자 계정을 연결해 부모 동의를 받지 않으면 야간 사용 제한이나 DM 차단 같은 보호 설정을 스스로 풀 수 없다. 유튜브는 만 13세 미만 자녀를 위한 감독 계정을 제공해 시청 가능 콘텐츠와 사용 시간을 부모가 직접 정하게 하고, 구글 패밀리링크는 14세 미만 구글 계정에 이 감독 기능을 기본값으로 걸어둔다. 틱톡의 패밀리 페어링도 같은 방식으로 부모 계정과 자녀 계정을 묶어 화면 시간과 다이렉트 메시지를 제한한다. 법이 나이를 확인해주길 기다리는 대신, 이런 보호자 감독 기능부터 계정마다 하나씩 켜두는 쪽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법은 호주가 먼저 세계 최초 타이틀을 가져갔고, 집행력도 계정 470만 개 삭제라는 숫자로 증명했다. 그런데 그 집행을 떠받치는 나이 인증 기술은 화장 하나, 거짓 숫자 하나로 뚫리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탈리아를 포함해 뒤따르는 나라들이 지금 진짜로 걸어야 할 승부는 몇 살로 선을 긋느냐가 아니라, 그 선을 실제로 지켜낼 인증 기술을 얼마나 빨리 신뢰할 만한 수준으로 만드느냐에 있다. 법 통과 소식이 뉴스가 되는 동안, 아이들은 이미 다음 우회로를 찾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 호주 eSafety 커미셔너 공식 안내 · 호주 16세 미만 SNS 금지 시행 결과 (moige.it) · 나이 인증 우회 사례 (Techlicious) · 이탈리아 법안 경합 현황 (Il Fatto Quotidiano) · 한국 청소년 SNS 규제 법안 현황 (헤럴드경제) · 인스타그램 청소년 계정 콘텐츠 제한 (농민신문)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